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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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외 태피스트리의 英 나들이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입력 : 2025-07-10 17:24:37
수정 : 2025-07-10 18: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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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066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을 다스리던 귀족이 약 1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바다 건너 그레이트브리튼 섬에 상륙했다. 그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섬 남부의 잉글랜드 지역을 점령하고 국왕에 올라 노르만 왕조를 선포했다. 이른바 ‘정복왕’(Conqueror)으로 불리는 윌리엄 1세(1066∼1087년 재위)가 바로 주인공이다. 그는 잉글랜드 국왕인 동시에 프랑스 국왕의 신하 신분이기도 했다. 어찌 보면 1066년 이후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한 나라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윌리엄 1세를 비롯한 노르만 왕조 역대 국왕과 그 측근들은 프랑스어에는 능숙해도 영어는 전혀 할 줄 몰랐다고 한다.

11세기 프랑스에서 제작된 이른바 ‘바이외 태피스트리’의 일부.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을 사실적으로 그린 직물 자수품이다. 당대 유럽인의 생활상을 세밀하게 묘사해 미술사적 가치가 큰 문화유산으로 평가된다. 프랑스 바이외 태피스트리 박물관 홈페이지

문제는 이런 기이한 동거(同居)가 오래 이어질 수는 없다는 점이다. 영국은 물론 프랑스 본토에도 영지(領地)를 갖고 있던 잉글랜드 국왕이 대체 언제까지 프랑스 국왕의 부하 노릇에 만족하겠나. “신하로서 예의를 지켜라”라고 요구하는 프랑스 국왕을 향해 잉글랜드 국왕은 “핏줄로 따지면 내게도 프랑스 왕위 계승권이 있다”며 맞섰다. 결국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1337년부터 1453년까지 백년전쟁을 치르게 된다. 이 싸움이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며 프랑스 안에 있던 잉글랜드 영지는 죄다 사라지고 두 나라는 완전한 남남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영국과 프랑스의 정체성이 비로소 확립됐다.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건너간 노르만 왕조 시절 프랑스어가 영국 상류층의 공식 언어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의 영어는 하류층이나 쓰는 천한 말로 전락해 과연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지경에 놓였다. 그런데 백년전쟁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 왕실 간의 유대 관계가 끊어지며 변화가 생겼다. 영국 왕실이 대중의 애국심을 고양하는 차원에서 프랑스어를 내던지고 영어를 받아들인 것이다. 백년전쟁에서 영국이 이겼다면 영국·프랑스가 하나로 통합되었을 테고, 그렇다면 프랑스어가 국어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 영국의 패배로 끝난 백년전쟁의 결과 영어가 오늘날 세계 공용어가 된 셈이다.

8일(현지시간) 영국을 국빈으로 방문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이 국빈 만찬에서 찰스 3세 영국 국왕과 건배하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이를 계기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바이외 태피스트리’의 영국 대여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AFP연합뉴스

‘바이외(Bayeux) 태피스트리’는 프랑스의 국보급 문화재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11세기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바이외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직물 자수품은 1066년 윌리엄 1세의 잉글랜드 정복 과정을 70m에 달하는 그림으로 묘사했다. 프랑스에서 만들어졌지만 영국사의 가장 중요한 대목을 담고 있는 셈이다. 지난 8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영국 국빈 방문을 계기로 프랑스 정부는 이 귀중한 보물을 2026년 9월부터 10개월 동안 런던 영국박물관에 대여한다고 밝혔다. 바이외 태피스트리가 프랑스 밖으로 나가는 것은 900여년 만에 처음이라니 영국인들이 흥분할 만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