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랄드 윙 수와 데이비드 수는 2008년 미국 내 소수집단들이 문화적 차이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문화정체성을 어떻게 형성해 나가는지를 설명하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데랄드 윙 수는 컬럼비아대학교 교수이자 다문화 상담 분야의 선구적인 학자이다. 수 교수는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중국계 미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부유했고, 백인이 주로 거주하는 동네에서 부모, 네 명의 형제, 한 명의 자매와 함께 살았다. 그는 어린 시절에 “자신의 민족성 때문에 놀림을 받았다”고 기억한다. 데이비드 수는 워싱턴 주립대학 심리학 명예교수이며, 심리 상담 클리닉 및 정신건강상담 프로그램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인종·문화정체성발달모형(Racial/Cultural Identity Development Model)’을 만들었다. 이 모형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이 모형에서 사용된 ‘인종’이라는 표현에 대해 동의하기 어려움을 밝히고 싶다. 지구상에는 호모사피엔스라는 인종 하나만 존재하며, 백인, 흑인, 황인과 같은 이들 사이에는 피부색의 차이가 있을 뿐 서로 다른 인종이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들은 이 발달 단계를 다섯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다.
첫째는 순응 단계(conformity stage)이다. 이 단계의 소수집단은 지배집단의 문화를 자기 집단의 문화보다 선호한다. 따라서 소수집단은 지배집단인 백인 미국인을 준거집단으로 삼고 그들처럼 되려고 노력한다. 이들은 자기 집단의 전통적인 의상, 외모, 행동방식 등을 부끄럽게 여기고 백인의 의상, 화법, 습관 등을 흉내 낸다.
둘째는 불일치 단계(dissonance stage)이다. 이 단계에서 소수민족은 자기 집단의 문화적 유산의 긍정적인 측면을 인식하고 고민한다. 자기 집단 구성원이나 그 자녀가 학교나 사회에서 훌륭한 성과를 거두는 것을 보면 이들은 자기 집단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 이들은 자기 비하와 자기 숭상 사이에서 갈등을 느낀다.
셋째 단계는 저항 및 몰입 단계(resistance and immersion stage)이다. 앞에서 갈등을 느낀 사람은 자기 집단의 관점을 받아들이고 다수집단의 문화에 저항할 수 있다. 이들은 과거 자기 집단을 부정적으로 여긴 것에 대한 죄책감과 수치심도 느낄 수 있다. 다수집단이 자기를 억압하고 세뇌했다고 생각하면 강한 분노마저 느낄 수 있다. 이제 이 단계 사람들은 자기 집단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그 집단에 대해 강한 소속감을 느낀다.
넷째 단계는 성찰 단계(introspection stage)이다. 소수집단 사람들은 다수집단에 대한 거부감이나 분노가 자기나 자기 집단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한, 자기 집단에 대한 지나친 몰입에서 벗어나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이 단계 사람들은 자신의 자율성과 개별성을 고려한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고 더 깊이 있는 정체성 탐색을 하고 재정립한다.

다섯째 단계는 통합적 인식 단계(integrative awareness stage)이다. 이 단계 사람들은 내적 안정감을 가지고 자기 문화와 다수 문화의 독특한 면을 모두 포용하려고 한다. 사람들은 모든 문화에는 수용 가능한 것과 수용 불가능한 것이 있음을 알고, 한 문화에서 수용 불가능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거부해야 한다고 여긴다. 이들은 자기의 온전성을 유지한 채 서서히 다문화적 존재로 변해 간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중국, 베트남, 태국, 우즈베키스탄 등 많은 소수집단이 존재한다. 이들은 한국에 살면서 자신의 생물적, 문화적 정체성에 대해서 갈등을 느낄 수 있다. 위에서 설명한 다섯 단계는 이들이 느끼는 갈등을 좀 더 체계적으로 생각해 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지금 나는 어느 단계인가?’라고 자문해 보고 왜 그 단계에 속한다고 여기는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한번 생각해 보길 바란다.
장한업 이화여대 다문화·상호문화협동과정 주임교수